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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의 대화] <파업전야> 장동홍 감독(2)
관리자 | 2019.11.19
질문)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과 어떻게 영화가 만들어지게 됐는 지를 말해달라.
답변) 전두환 시절 만들어진 영화이다. 암울했던 시절이고 개인적으로는 20대로 군대를 막 전역했던 때이다.
영화를 전공했고 워크숍에서 <그날이 오면>이라는 전경이 주인공인 단편영화를 제작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는 87년 6월 항쟁, 89년 노동자대투쟁 등 사회적으로 민주의식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즈음 대학에서도 사회의식을 담으려는 영화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장편을 제작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창작집단이 장산곶매였다.
<파업전야>를 만들기 전에는 <오! 꿈의 나라>(1989)라는 광주사태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광주에서 상영 당시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이후 제작전반에 대한 반성이 있었고 다시 역량을 모아서 만든 영화가 <파업전야이다>
질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영화를 제작했다. 제작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답변) 영화과 졸업 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인천 부평지역 5공단 활동가 사례를 취재했고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거의 대부분 실제 사례들이다.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어떻게 만들지가 고민이었다. 스토리는 '각성'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 인물이 노조결성에 참여하기 직전까지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중미술, 노동문학이 나올 때라 일종의 사회적 성과물들이 있었다. 한수라는 스패너를 드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방현석 작가의 <내딛는 첫발은>이라는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한겨울 얼음처럼 '쨍'한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당시는 현상소에서 프린트를 해야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는데 메이저 현상소들이 모두 거절했다. 그 와중에 가장 열악하고 영세한 현상소 한 곳에서 간신히
프린트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프린트 한 벌 한 벌이 매우 중요했다. 각목을 들고 프린트를 지키는 사수대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전남대에서는 프린트 침탈사건이 있어 헬기가 동원되고 최루탄이 터졌다. 최루탄에 맞은 학생 하나가 아래 턱이 다 나가버렸던 일도 있었다.
질문) 검열이라는 장치가 있었는데 어떻게 상영을 할 수 있었나?
답변) 사전심의제도가 있었다. 현재는 등급제로 바뀌었다. 우리는 일반 상영관에서 영화를 상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의를 받지는 않았다.
대신 영화법, 공연법 위반으로 수배 대상이 되었다. 심의제도를 바꾸려고 헌법재판소에 소를 제기해 위헌판결을 얻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질문) <파업전야> 이후는 어땠나?
답변) 장산곶매가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졸업하고 가정이 생기면서 취직도 해야했고 가장노릇도 해야했으니 자연스레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몇몇은 충무로에 진출에 상업영화 감독이 되거나 관련 일을 하면서 지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질문) 감독이 4명으로 되어있다. 공동연출을 했다는 의미인지?
답변) <오! 꿈의 나라>는 공동연출을 했다. 기계적으로 씬을 4등분해서 각각의 감독이 연출했는데 결과적으로 반응이 좋지 않았고, 1인 감독체제의 시스템이
가장 적합하다 느꼈다. 감독의 4명으로 올라와 있기는 하지만 <파업전야>의 책임연출은 나였다.
관객) 사회학을 전공했다. 영화사회학시간에 본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돼 기뻤다. 10년 전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공장에서 목격한 일들이 영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인물군상도 너무나 유사해서 많이 공감이 됐다. 하지만 훨씬 어린 세대인 내가 이 영화에 공감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만 같아 아쉽다.
영화가 많은 위로가 되었고 부끄러운 감정을 들게 했다. 출연자들은 모두 학생들이었는 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감독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답변) 대부분은 학생들이었고 조금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연극배우였다. 영화 속 인물 재만은 KBS연기자였다.
영화를 찍은 곳은 한도금속이라는 공장이었다. 실제로 가봤더니 영화를 찍기에 정말 좋은 장소였는데, 사업주가 영화를 찍으라고 공간을 내줄리가 만무했다.
다른 장소를 모색하던 중 그쪽 노동자분이 전화를 주셨다. 그곳이 지금 파업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시나리오가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는데 곧바로 영화를 찍으러 갔다.
파업 중이어서 보일러, 전기를 모두 끊어놔 영화 찍는 내내 고생을 했다. 잠을 잘 때도 영화에서처럼 박스를 깔고 바닥에서 자고... 영화 중반 이후부터는
일부러 꾸미지 않았는데 배우들이 모두 정말 꼬질꼬질해졌다. 실제 파업을 하시는 노동자분들이 놀릴 정도였다.
관객) 이후에 주목할 만한 노동영화가 나왔었나?
답변) <파업전야>는 당시 3천만원의 제작비가 든 영화였다. 지금 만들라고 하면 예산이 80~100억은 든다.
요즘처럼 대기업에서 배급, 상영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다.
<파업전야>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이후에 그렇다할 노동영화가 나오지 못했는데... 장산곶매 멤버였던 명필름 이은 감독이 <카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해서 노동영화의 저변을 넓히지는 못했다.
질문) 노동영화가 흥행이 될 여지는 없을까. 감독님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영화가 있다면?
답변) 이은 감독이 내년에 전태일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준비중이다. 예전 멤버들이 모여서 <파업전야2>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우스개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자본의 속성을 알기에 쉽게 실행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내공을 쌓고 있다. 다르덴형제처럼 가차없는 진실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질문) 관객 소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소감이 있다면?
답변)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하는 말이 있다. 백기완 선생이 영화를 보고난 후 술자리에서 나를 따로 불러
"수고했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새 길을 내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2019 부마민주영화제>의 다른 행사에도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