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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토크]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1)
관리자 | 2019.11.24
안녕하세요.
부마민주영화제 서포터즈 손가입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행사는 지난 11월 17일에 있었던 테이블토크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인데요.
이 행사는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해산했던 마산지역의 '집현전'이라는 책공간 및 모임 전후의 사람들과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집현전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 사건들을 직접 집현전에 참여한 인물들에게
들어보는 '테이블 토크'였습니다.
이날 사회를 맡은 박진해 대표님(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외 패널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사실 관객분들보다 많았지요.
재경마산학우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집현전'에 대해 여전히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셔서 참석자도 그만큼 적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 역시 81년생이라 79년 부마민주항쟁은 역사 속 한 줄로만 기억하고 있었고 집현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날 장장 4시간에 이르는 집현전이 생기기 전후 이야기와 당시 참여한 분들의 생생한 증언,
79년 부마민주항쟁 이후 구속되었던 관련자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 듣다보니 마치 한 편의 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참여자들이 각자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었던 점도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그때의 청년들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했어요.
긴 이야기를 이번 게시글로 다할 수는 없지만, 집현전의 이야기는 이후 여러 형식으로 재탄생될 거라 믿고 싶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가 과소평가되어왔다는 최근의 평가처럼 부마민주항쟁을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이를 다루는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들이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집현전은 1978년 8월 경남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줄여서 경남양서보급회였는데, 서점이자 문화공간으로서 '집현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창립 당시의 주요인물이었던 김진식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78년 봄 신림동 하숙집에 이광조 선배님이 찾아와
부산에 양서협동조합이라는 곳이 있는데 대학생을 대상으로 책도 보급하고 토론도 하는 매우 좋은 공간이 있어
마산에도 이와 비슷한 곳을 만들고 싶다는 도움을 요청하였답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이광조 선배는 방학때마다 김진식 선생님에게 서울 학생들 동향을 물으며
마산에서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던 분이라고 해요.
이런 계기로 완월동에 서점 겸 문화공간인 '집현전'을 임시 개관하게 되는데 본격적인 서점이 되기 전 상태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
김진식 선생님(당시 서울대 동문회장)은 1975년도 재경마산학우회의 11대 회장이었던 서익진(당시 서울대 경영학과 재학) 선생님과
재경마산학우회를 이끌던 분이셔서 집현전은 자연스레 재경마산학우회 회원들의 활동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사회를 맡은 박진해(당시 연새대 동문회장) 선생님, 정성기(당시 경남대 재학 중) 선생님 등 패널로 나오신 분들 다수가
집현전을 이용하고 집현전에서 세미나 등을 진행하던 분들이었습니다.
집현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재경마산학우회에 대한 긴 설명이 필요했던 이유였습니다.
서울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마산출신 학생들의 모임이었던 재경마산학우회는
1974년 10대 회장이었던 한철수(당시 고려대 기계과) 선생님 이후부터 보다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합니다.
박진해 선생님이 편집부장으로 선출되면서 회지를 만들자는 의견을 모아 <남도>라는 회지의 창간호를 만들기도 하고요.
1975년 11대 회장이었던 서익진 선생님 이후 사회, 학술 분야 명사들을 모시고 학술강연회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방학때면 마산으로 돌아와 학술강연회, 예술제를 준비하던 대학생들은 학술강연회에서 강만길, 한완상 등 기라성같은
분들을 직접 섭외해 강연을 열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이즈음 재경마산학우회에서는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서울에 정착할 가능성이 높고 이후 생활도
서울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기에 지역에서 만들어가는 이러한 활동들이 단발성으로 끝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그리하여 재경마산학우회 지도부는 첫 번째로는 졸업 후에도 마산에 정착해 지역을 변화,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두 번째로는 마산지역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이에 접근한 인물이 당시 77학번으로 경남대에 사회과학연구회를 처음 만든 정성기 선생님이었지요.
정성기 선생님은 경남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상태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는 시기를 겪을 정도로
가난을 몸소 체험했던 학생이었습니다.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된 이유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라고 밝힐 정도였지요.
이외에 연극활동에 심취하게 되는 76학번 이윤도 선생님, 77학번 하효선(당시 국제개발학과 재학, 현 리좀 대표) 등 경남대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마산지역 대학생들의 활동이 재경마산학우회에서 집현전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정성기 선생님은 양서선정위원장으로 함께 읽을 책을 선정하고 하효선 선생님은 부산양서조합으로 가 직접 양서를 사오는 역할,
대출반납노트를 관리, 보관하는 역할을 맡으셨답니다.
이외에도 집현전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현 대학생이 아닌 마산 지역 일반 청년분들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78년 서울에서 공장을 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정혜란 선생님도 그 중 한 분이셨답니다.
근처 마산세무서 등을 다니던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완월동 집현전은 십시일반 각자의 책들을 모아 약 600권의 책이 비치된 서점준비공간이었는데요.
주요 멤버들이 서점을 알리고 활성화하기위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학, 영어강좌를 개설하고
한국근대사, 여성학강좌를 열기도 했답니다.
수학, 영어강좌는 신청자가 거의 없고 한국근대사, 여성학강좌가 인기가 많았데요.
하지만 집현전은 1978년 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 이야기는 2편에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