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포터즈
- 감독과의 대화 [김군] 감독_강상우
- [테이블토크]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2)
- 늦은 후기 11.14 (1979 부마의 기억)
- 부마민주 영화제 감독과의 대화_[김군] 감독 : 강상우
- 이용철 평론가와 함께하는 씨네토크
- [테이블토크]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1)
- 베를린 장벽 섹션 [베를린 장벽]
- 부마민주항쟁 다큐멘터리'1979부마의 기억'
-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소와 감독과의 화상채팅
- [평양을즐겨요] [한반도, 100년의 전쟁]
- 부마민주 영화제 감독과의 대화_[연인과 독재자] 감독 : 신정균 (신상옥, 최은희
- 부마 민주 영화제 개막식 및 개막 상영_부마민주항쟁 다큐멘터리 [1979 부마의
- 감독과의 대화 [파업전야] 장동홍 감독(2)
- 감독과의 대화 노동영화의 전설[파업전야]의 장동홍 감독(1)
- 보도기사
- 공지사항
- 문의사항
서포터즈
[테이블토크]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2)
관리자 | 2019.11.25
<집현전 그때 그 사람들> 참석후기 1편에 이어 2편을 작성합니다.
1편에서는 집현전의 주요 멤버였던 재경마산학우회의 당시 활동과 이들 활동이 경남대 학생들과의 연계로 확장된 계기,
그리고 1978년 8 월 경남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으로으로 출발한 집현전의 창립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2편에서는 집현전의 공간이전과 79년 부마민주항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신 부분을 정리해 전달하고자 합니다.
78년 8월 양덕성당 근처 완월동을 본거지로 했던 집현전은 78년 말 12월 30일 임시총회를 계기로 이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창립자였던 이광조 선배님께서 경영상의 이유로 서점운영을 포기하면서 임시총회를 소집해 이를 공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자금조달이 쉽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해요.
해산이 공표되기는 했으나, 집현전을 이용하는 멤버들은 "비만 피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집현전의 책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전해
집현전의 공간을 존립시키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창동주변의 철도길 옆 판잣집을 근거지로 하기로 하고 마산학생회 연극회의 무대설치 파트 학생들이
달려들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을 고치고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환골탈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은 적어도 5~6명은 함께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낡은 판잣집에 전기도 끌어와 전기등을 달고요.
또 개발예정지인 탓에 월세가 싸서 들어가기는 했지만, 주로 학생들인 처지에 돈이 없어 유일하게 임시교사로 돈을 벌던 박진해 선생님이
월급의 일부를 월세를 지불하기도 했다고 해요.
이로써 집현전 2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단골손님들은 더 자주 집현전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직접 공간을 만들어 애착이 있었던데다 멀리서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공간이 들어서기만하면
책장 가득 들어찬 금서들과 학생들의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지던 그들만의 아지트가 된 것이지요.
게다가 창동 근처로 이사를 오면서 근접성이 높아져 주요 멤버들의 이용율은 더 높았다고 합니다.
그들 중 하효선 선생님은 창동에 살고 있던 터라 누구보다 자주 집현전을 들락거렸고
집현전에 비치될 책을 사러 부산양서조합을 오고갔다고 합니다.
책선정은 주로 국가에서 해주었다고 해요.ㅋ (금서=양서)
금서라고는 해도 책 구입 자체는 가능한 상황이어서 한 번 부산에 책을 사러 가는 날이면
20~30권씩 책을 사들고 왔다니 대단한 학구열이었으리라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 시절 집현전에서는 여성학을 공부하는 모임으로 인해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하효선, 정혜란, 이명희... 등 여성들은 집현전을 통해 보다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지요.
당시 사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계신 박진해 선생님은 이야기 중간 중간 발간된 서적이며, 선언문 등을
직접 보여주시며 그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중 한 회지에는 가장 많은 대출을 한 도서목록이 있었는데,
1위가 장길산, 2위가 창비(잡지), 3위가 머나먼 쏭바강이었다는 걸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의 군복무와 졸업 등으로 인해 집현전의 미래도 불투명해지면서 창동 근처 집현전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즈음 월세를 내던 박진해 선생님도 해군에 입대하게 되고요.
그리하여 집현전은 7월 7일 임시총회에서 활동중단을 선언하지요.
도서는 기증자에게 모두 반납하는 걸로 결론이 나고요.
물론 단박에 모임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이후에도 10여 명의 여성들은 세미나와 모임을 이어가면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0월 18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불과 3개월 전의 일입니다.
그러던 중 10월 18일 부마민주항쟁이 터진 것이지요.
이야기는 10월 18일과 18일 이후 집현전의 멤버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데로 흘러갔습니다.
책 구입에 깊이 관여한 하효선 선생님은 도서대출명부를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는 급박감에 집현전을 찾습니다.
경찰이 부마민주항쟁의 주요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집현전의 멤버들도 하나 둘 잡혀가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집현전이 완전히 드러나면 도서대출명부야말로 데스노트가 될 건 뻔한 일이니까요.
도서대출명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 하효선 선생님은 엄마에게 절대로 명부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후
언제 돌아올 수 있을 지 모르는 부산으로의 피신길을 떠납니다.
부산으로 피신하기 전 하효선 선생님은 또 다른 멤버와 함께 정혜란 선생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요.
세 명이 모여있던 찰나, 형사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행이 두 사람은 장롱 안에 숨어 검거를 면하고 정혜란 선생님은 형사에게 끌려가게 되지요.
집현전의 창립을 도운 김진식 선생님은 방위로 근무를 하던 때라 퇴근즈음 10월 18일에 일어난 항쟁를 확인하게 됩니다.
불에 탄 산호동 경찰서도 직접 가서 보고요.
재미있는 건 그즈음 창원여전 선생님의 부탁으로 여전 학생들의 연극공연을 준비중이었는데
공연이 10월 25일이어서 18일 항쟁이 일어나기 전 포스터를 거리마다 붙였다고 해요.
그런데 그 연극의 제목이 마침 <봇물이 터졌어요>라서 그 일로 경찰의 조서를 받았다는 웃푼 사건도 있었답니다.
정성기 선생님은 항쟁이 일어난 직후 끌려갔고요.
이외에도 상당수의 회원들이 구속되거나 직간접적인 관여를 하였다고 하니
부마민주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직이 바로 이 <집현전>과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들은 거의 대부분 10.26 사건 이후 출소되었고, 하효선 선생님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해요.
정성기 선생님의 어머니는 김재규를 '생명의 은인'이라 했을 정도로 10.26사태가 없었다면 여러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겠지요.
이렇게 장장 4시간이 넘는 동안 이어진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었고,
저는 돌아오는 내내 집현전과 당시 청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했어요.
언젠가 때가 되면 정말 제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날을 기다리며 이번에는 이렇게 두서없이 거친 글로나마 내용을 전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